오마이뉴스 | "정의가 소멸"... 집권세력 교체한 상소문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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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행의 대행'의 국정 운영이 고종 임금 때 있었다. 지난해 12월 27일 대통령권한대행인 한덕수 총리가 탄핵 소추되고 최상목 부총리가 권한대행이 되자, '대행의 대행'이란 말이 회자됐다. 최상목 부총리는 한덕수 총리를 대행한 게 아니라 윤석열 대통령을 대행했으므로, 이 경우에는 '대행의 대행'이란 말이 엄격히 들어맞지 않는다. 명실상부한 '대행의 대행'은 고종 때 있었다.
'대행의 대행'의 등장은 철종 임금의 죽음이 계기가 됐다. 음력으로 철종 14년 12월 8일 자(양력 1864.1.16.) <철종실록>은 그날 오전 5시에서 7시 사이인 묘시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철종이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준다.
철종이 1863년 12월 8일에 죽었다고 적힌 역사서적이나 인터넷 백과사전이 많지만. 이는 실록 상의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하지 않은 결과다. 철종이 1864년에 사망했으므로, 후임인 고종이 1863년에 즉위했다는 서술 역시 오류다. 고종의 왕권이 '대행의 대행'으로 인해 제약을 받은 것은 1864년 이후의 일이다.
철종은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철종시대의 대왕대비이자 추존왕 익종(효명세자)의 배우자인 조 대비(신정왕후)는 철종의 7촌 조카뻘인 12세 고종을 신왕으로 지명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당시는 흥선군) 이하응도 있었고 고종의 형인 이재면(당시 19세)도 있었지만, 직계가 아닌 방계가 승계할 때는 나이 어린 미혼자가 유리했다. 여기다가 세상 물정 모르는 꼭두각시를 왕으로 세우고자 했던 조 대비와 흥선대원군의 계산도 작용했다.
어린 군주가 등극했으므로 56세의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개시했다. 그런데 수렴청정권의 일부는 흥선대원군에게 넘어갔다. 대원군의 섭정권은 임금의 아버지라는 지위에서 발생하지 않고, 신정왕후의 권한 위임에 근거했다. '대행'인 조 대비의 위임에 의해 '대행의 대행'인 이하응이 권한을 갖게 됐던 것이다.
'대행의 시대'가 '대행의 대행의 시대'로 완전히 넘어가는 데는 시간이 소요됐다. 1885년에 개화파(시장개방파)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흥선대원군 약전>은 "전권을 물려받은 것은 익년인 을축년에 대왕대비 조씨에게 권하여 경복궁을 중수(重修)한 때"라고 알려준다. 양력 1865년 1월 27일부터 시작된 음력 을축년에 조 대비의 권한 대부분이 이하응에게 사실상 넘어갔다는 언급이다.
수렴청정 끝났지만... 실권 잡지 못한 고종
조 대비가 수렴청정하고 대원군이 섭정하는 구도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에서 격침되고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도발한 1866년에 종결됐다. 고종 즉위 2년 만인 1866년 3월 29일(음력 2.13)의 일이다. 음력으로 이 날짜 <고종실록>은 "오늘부터 수렴청정을 거두고 크고 작은 공무를 주상이 일체 총괄하라"는 조 대비의 교서를 들려준다.
그해에 고종은 14세였다. 훌륭한 군주로 평가되는 성종(연산군 아버지)은 19세까지 수렴청정을 받았고, 즉위 당시 유능하다는 평을 받은 선조는 16세까지, 고종의 전임인 철종은 23세까지 받았다. 수렴청정이 이례적으로 빨리 끝난 것은 조 대비가 교서에서 지적한 대로 고종의 학문과 업무능력이 높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대원군이 국정을 장악한 뒤라 수렴청정 종결 여부가 별다른 변수가 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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