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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최고관리자 /  DATE: 25-06-06 18:04 /  HIT: 12회

오마이뉴스 | 역사적 정권교체... 경제정의 추구하는 세력이 권력 잡은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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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18년간의 정권교체들 중에서 정치사뿐 아니라 사회사적으로도 커다란 의미를 띠는 것이 있다. 단순한 정파 교체로 끝나지 않고 지배층 교체로까지 귀결된 사건이다. 임진왜란 25년 전인 1567년 8월 7일(음력 7.3) 선조 임금의 즉위는 그런 의미를 갖는 역사적인 정권교체다.

선조 개인만 놓고 보면, 그의 즉위는 약체 군주의 출현이었다. 선조는 선왕인 명종의 아들이 아니다. 그는 명종의 아버지인 중종이 낳은 덕흥군이라는 서자의 아들이었다. 광해군의 예에서 나타나듯이 '왕의 서얼'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설움을 톡톡히 받을 수 있었다. 선조는 '왕의 서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왕의 서얼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즉위는 역사적인 지배층 교체를 수반했다. 이는 낡은 지배층인 훈구파가 퇴장하고 신진 지배층인 사림파가 역사의 주인이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훈구파→사림파로 넘어간 조선의 권력

그 이전 시대를 주도한 훈구파는 1392년 건국 이후의 주요 정변들에서 공로를 세워 정치적 입지를 굳히고 수도권에 기반을 둔 대토지 소유자들이었다. 이것이 훈구파의 평균적인 모습이다. 반면, 유림세력인 사림파는 정변보다는 성리학적 교양을 기초로 과거시험 급제나 학문적 명성을 성취하고 이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했다. 이들의 '지역구'는 주로 지방이었다. 부동산 보유 규모로 보면, 일반적으로 중소 지주였다.

일반 대중이 볼 때는 훈구파는 물론이고 사림파도 딴 세상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훈구파에 비하면 사림파가 상대적으로 건전했다. 사림파는 절차를 중시하고 도(道)를 따졌다. 대토지 소유를 견제했기 때문에 경제정의 측면에서도 비교적 깨끗했다. 선비 출신 관료들이 겉으로라도 항상 청빈한 삶을 표방한 것은 사림파가 대토지 소유자들의 라이벌이었던 것과 무관치 않다.

사림파는 선조 즉위 훨씬 전인 1516년부터 1519년까지의 기간에도 집권한 일이 있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옹립한 훈구파를 견제할 목적으로 중종이 34세의 신진 관료인 조광조에게 힘을 실어준 결과였다. 그러나 조광조가 예상외로 강도 높은 개혁을 추진하는 데다가 훈구파는 물론이고 왕권까지 위협할 조짐이 있다고 판단되자 중종은 조광조를 전격 숙청하고 처형했다.

1516년의 사림파 집권은 일시적인 일이었다. 이에 비해 1567년의 집권은 사실상의 영구 집권이었다. 그 뒤 훈구파는 도태되고 사림파가 300여 년간 왕조를 주도했다.

숙적 훈구파를 물리친 사림파는 승자들의 일반 패턴에 따라 내부적인 세포분열에 돌입했다.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되고 다시 남인·북인과 노론·소론으로 갈라졌다. 이들의 당쟁은 영조와 정조의 탕평정치로 인해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가 정조가 죽은 1800년 이후로 특정 노론당 가문에 의한 세도정치로 변질됐다. 이것이 국가 시스템을 약화시키면서 조선왕조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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