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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최고관리자 /  DATE: 25-06-15 18:31 /  HIT: 3회

오마이뉴스 | 대통령의 장관 입각 제의를 끝까지 거부한 기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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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은 '재산의 사회적 환원'을 실천해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런데 그는 재산의 환원 못지않은 가치를 실천했다. 큰 기업을 운영하면서도 정경유착을 일관되게 거부했다. 그 시절에는 정치지도자들이 '재산의 정치적 환원'을 기업가들에게 요구하는 일이 훨씬 많았다. 그런 시절에 정권과의 유착 없이 큰 기업을 키우고 지켜낸 것은 경이적인 일이다.

일본군의 동학혁명군 진압이 막바지에 달한 1895년 1월 15일에 평양에서 출생한 유일한은 아홉 살 때인 1904년에 미국 유학을 떠났고, 미시간대학 상과를 졸업한 지 3년 뒤인 1922년에 숙주나물 통조림 판매처인 라초이식품회사를 설립했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에도 참여한 그는 서른 살 때인 1925년에 31세 많은 독립운동가 서재필과 함께 류한양행을 창립하고 영어로는 뉴일한(New il-han & Company)으로 표기했다.

1926년에 귀국해 그해 12월 10일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은 진통소염제 안티푸라민 등을 판매해 회사를 키웠고, 1936년에는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하는 선구자적 모습을 보였다. 해방 뒤에는 교육 분야로도 영역을 넓혀 1952년에 고려공과기술학교(유한공고)를 설립했다. 71세 때인 1969년에 경영 일선을 떠났다가 2년 뒤 타계했다.

1922년부터 1969년까지의 기간 동안, 노동자 권익을 보장하고 신제품을 개발하고 기업을 확장시키는 동안에 그가 특히 역점을 둔 것은 기업을 정치로부터 차단하는 일이었다. 그의 정경유착 거부는 미국에서 독립운동하면서 친분을 쌓았던 이승만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났다.

미주 지역 시장 개척을 위해 1938년에 미국으로 떠난 유일한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7월 18일 인천항을 통해 귀국했다. 그해 연말에 재계는 8년 만에 귀국한 51세의 유일한을 경성상공회의소 회장(11.25)에 이어 조선상공회의소 회장(12.3)으로 추대했다.

이즈음에 그가 만난 인물이 71세의 이승만이다. 그는 미군정의 지원하에 해방정국의 실력자가 되어 있는 이승만을 예방하고자 서울 성북구 돈암장으로 찾아갔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쓴 <유일한의 생애와 사상>은 "그 당시 장면을 말해준 사람에 의하면, 이승만 박사는 유일한 회장의 내방을 받고 직접 대문까지 나와서 맞았다고 한다"는 말을 들려준다.

이승만의 정경유착 요구 끝까지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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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승만은 "함께 앞날의 조국을 위해 일하자"는 말을 했다. 유일한은 이 말을 정치자금을 달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위 전기는 "이승만 박사의 심중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유일한 회장은 틀림없이 이승만 박사가 정치자금을 요청해올 것을 직감했다"라며 "미국에 있을 때도 그런 관계가 있었고"라고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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