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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최고관리자 /  DATE: 25-05-05 19:19 /  HIT: 4회

오마이뉴스 | "어린 것들이 뭘 안다고..." 초등학생 강사들의 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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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강요한 문자 생활은 한국인들에게 고통과 부담을 줬다. 그것은 하나를 버리고 둘을 새로 배워야 하는 일이었다. 히라카나와 가타카나는 물론이고 한자까지 공부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고대 이래로 한국인들은 한자와 궁합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고대 한국인들은 한자를 알파벳처럼 활용하는 이두를 고안해냈다. 이두문자를 한국어 어법에 맞춰 쓰는 모습은 조선시대 관공서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13년 전인 1579년 6월 30일(음력 6.7), 황해도 백천군의 노비들인 막심과 막동이 매매됐다. 이 거래를 증명하기 위해 관아에 제출된 계약서 겸 영수증인 명문(明文)은 한문이 아닌 이두로 작성됐다. 이 문서에는 우리말 '은/는'이 와호(臥乎)로 표기돼 있다.

머릿속으로는 주어-목적어-서술어 순으로 생각하고 글을 쓸 때는 주어-서술어-목적어 순으로 배열하는 게 한국인들에겐 불편했다. 그래서 막심·막동의 주인 같은 양반들도 법률문서나 공문서를 작성할 때는 이두를 쓰는 예가 많았다. 조선시대에 훈민정음이 대중화되지 못했다고들 하지만, 한자 역시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1894년 동학혁명을 계기로 한자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동학혁명으로 양반계급의 권위는 추락했고, 이 때문에 양반의 문자인 한자의 권위도 떨어졌다. 이렇게 해서 가까스로 한자에서 벗어나던 한국인들에게 일제가 강요한 것이 한자 없이 쓰기 힘든 일본 문자다. 이 강요가 얼마나 진절머리 나는 것인지는 1942년의 조선어학회 사건이 잘 증명한다.

조선어학회 사건과 무명 투사들

한글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 최현배나 이희성 같은 조선어학회 관계자들만 참여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무수한 투사들이 이에 동참했다. 그중에는 어린이나 청소년도 많았다. 이들의 활동 중에는 독립운동으로 봐야 할 사례도 적지 않다. 국가보훈부에 의해 독립유공자 지정을 받지 못한 고명걸·장복성·채석진과 신동영의 활약도 그런 사례에 포함된다.

강원도 원산에 명성(明星)학원이 있었다. 원산불교포교소가 설립한 이 학교는 서민층 자녀를 위한 보통학교(초등)였다. 1932년 7월 15일자 <동아일보> 3면 우상단은 "무산아동을 중심"으로 하는 학교라고 소개했다.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나 소작농의 자녀들이 많이 다닌 학교였다.

명성학원 학생 고명걸은 1934년 여름에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문자보급운동에 참여한 5078명 중 1인이다. 조선일보사는 외형상 이 운동을 한글운동이 아닌 문맹퇴치운동으로 설정했다. 일제 식민정책이 한반도 곳곳에 파급되기 위해서는 문맹률이 떨어져야 했다. 어느 문자든지 간에 조선총독부와 소통할 수 있는 문자를 대중이 해득하는 게 일제의 한국인 동원에 유리했다. 그래서 총독부는 경찰을 동원해 감시와 훼방을 하면서도 이 운동을 전면적으로 제지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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