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 "기억하는 자가 없으면, 진실은 두 번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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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은 최근 '인혁당재건위 사건 사형수 8인의 약전' <다시, 봄은 왔으나>를 펴냈다. 1975년 4월 9일,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8명의 젊은이가 사형대에 올랐다. 비극의 그날, 한국 현대사 한복판에 깊고도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새겨졌다. 그리고 긴 세월이 흘러, 우리는 다시 묻는다. "그들의 봄은 정말 왔는가?" 이 책은 '잊힌 봄'을 복원하는 작업이다.
저자는 10여 년에 걸쳐 45인의 생존자, 유가족, 동료들의 증언을 모았다. 불태워진 기록 대신, 살아남은 기억의 조각을 꿰어낸 이 거대한 구술사작업은 단순한 추모가 아니다. 이 책은 "기억하는 자가 없으면, 진실은 두 번 죽는다"는 다짐이자 선언이다. 아래는 지난 24일부터 30일까지 저자와 이 책과 관련해 이메일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먼저 이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재단에 사료실장으로 입사할 때부터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다만 처음에는 각 개별 열사들의 평전을 만들려고 하다 여러 이유로 인해 그 작업은 어렵게 되었고 그래서 나오게 된 것이 이 책이다."
- 이 책을 쓰면서 가장 안타깝고 어려웠던 일은?
"기록이 많이 유실되었다는 것이다. 우선 이 사건을 조작했던 주체인 공안기관들이 관련 사료를 많이 삭제한 것과 항상 위험을 감수하며 변혁 운동을 해야 했기에 보안에 철저할 수밖에 없었던 분들이기에 스스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어려웠던 일은 50여 분 인터뷰를 하는 동안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많았다. 그것을 다 책으로 옮길 수 없다보니 선별해야 했다. 그 과정이 제일 힘들었다."

-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위헌적 계엄과 국회해산 및 헌법정지 등을 골자로 하는 특별선언을 발표하며 1인 독재 집권을 영구화하기 위한 유신쿠데타를 일으켰다. 1974년 박정희는 유신독재에 대한 국민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인민혁명당'이라는 명칭에서부터 모든 내용을 고문조작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1975년 4월 8일, 8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런데 사형이 선고된 지 채 18시간 만인 4월 9일 새벽에 사형을 집행했다. 왜 박정희는 이렇게 급하게 이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나?
"당시 박정희는 위급했다. 국제사회 압력이 대단했다. 그래서 1975년 1월에 민청학련사건 관련자들을 대부분 풀어 주었는데, 풀려난 대학생들이나 지학순 주교와 같은 분들을 환호하는 인파를 보고 박정희가 분노했다. 실제로 신문기사에 박정희가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자들이 마치 개선장군처럼 만세를 불렀다'고 말했다는 부분이 나온다. 10년 동안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던 자가 자신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고 참지 못했던 거다.
정의롭지 못한 세력은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기상천외한 짓거리들을 많이 한다. 게다가 대법원 판결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사형을 집행한 것은 이미 계획된 일이었다. 사형집행명령서를 보면 하루 전 8일에 있었던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작성된 흔적이 있다. 그것은 사형확정 후 또다시 벌어질 구명운동을 사전에 막아보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 이날 억울하게 사형당한 8분이 어떤 분들인지?
"이 분들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성장기에는 혼란스러운 해방정국과 한국전쟁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러다가 4.19혁명이 난다. 이 시기 부산에서 결성된 고교생 사회과학 서클 암장 회원들은 드디어 화산 분출이라는 거대한 시작을 실천에 옮겼다. 또한 대구에서는 어느 지역보다 먼저 한국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국전쟁피학살자유족회 활동이라든지, 교원노조결성투쟁, 2대악법반대투쟁 등이 모두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투쟁의 중심에 있었던 20,30대 젊은 활동가들이 바로 인혁당 사형수들이었다. 이러한 투쟁경험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3선 개헌을 해서 대통령이 되고 유신쿠데타를 일으켜 종신집권을 하는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6.3항쟁때도 민청학련사건 때도 이들은 제2의 사월혁명을 꿈꿨으며, 그리고 나면 새사회 건설에 나서겠다는 꿈을 이어가고 있었던 분들이셨다. 이분들의 꿈은 자주독립국가 건설이었다. 해방이 되도 외세를 몰아내지 못하고, 그 외세에 의해 분단과 전쟁이 벌어진 상황을 너무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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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10여 년에 걸쳐 45인의 생존자, 유가족, 동료들의 증언을 모았다. 불태워진 기록 대신, 살아남은 기억의 조각을 꿰어낸 이 거대한 구술사작업은 단순한 추모가 아니다. 이 책은 "기억하는 자가 없으면, 진실은 두 번 죽는다"는 다짐이자 선언이다. 아래는 지난 24일부터 30일까지 저자와 이 책과 관련해 이메일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먼저 이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재단에 사료실장으로 입사할 때부터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다만 처음에는 각 개별 열사들의 평전을 만들려고 하다 여러 이유로 인해 그 작업은 어렵게 되었고 그래서 나오게 된 것이 이 책이다."
- 이 책을 쓰면서 가장 안타깝고 어려웠던 일은?
"기록이 많이 유실되었다는 것이다. 우선 이 사건을 조작했던 주체인 공안기관들이 관련 사료를 많이 삭제한 것과 항상 위험을 감수하며 변혁 운동을 해야 했기에 보안에 철저할 수밖에 없었던 분들이기에 스스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어려웠던 일은 50여 분 인터뷰를 하는 동안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많았다. 그것을 다 책으로 옮길 수 없다보니 선별해야 했다. 그 과정이 제일 힘들었다."

-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위헌적 계엄과 국회해산 및 헌법정지 등을 골자로 하는 특별선언을 발표하며 1인 독재 집권을 영구화하기 위한 유신쿠데타를 일으켰다. 1974년 박정희는 유신독재에 대한 국민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인민혁명당'이라는 명칭에서부터 모든 내용을 고문조작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1975년 4월 8일, 8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런데 사형이 선고된 지 채 18시간 만인 4월 9일 새벽에 사형을 집행했다. 왜 박정희는 이렇게 급하게 이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나?
"당시 박정희는 위급했다. 국제사회 압력이 대단했다. 그래서 1975년 1월에 민청학련사건 관련자들을 대부분 풀어 주었는데, 풀려난 대학생들이나 지학순 주교와 같은 분들을 환호하는 인파를 보고 박정희가 분노했다. 실제로 신문기사에 박정희가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자들이 마치 개선장군처럼 만세를 불렀다'고 말했다는 부분이 나온다. 10년 동안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던 자가 자신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고 참지 못했던 거다.
정의롭지 못한 세력은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기상천외한 짓거리들을 많이 한다. 게다가 대법원 판결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사형을 집행한 것은 이미 계획된 일이었다. 사형집행명령서를 보면 하루 전 8일에 있었던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작성된 흔적이 있다. 그것은 사형확정 후 또다시 벌어질 구명운동을 사전에 막아보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 이날 억울하게 사형당한 8분이 어떤 분들인지?
"이 분들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성장기에는 혼란스러운 해방정국과 한국전쟁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러다가 4.19혁명이 난다. 이 시기 부산에서 결성된 고교생 사회과학 서클 암장 회원들은 드디어 화산 분출이라는 거대한 시작을 실천에 옮겼다. 또한 대구에서는 어느 지역보다 먼저 한국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국전쟁피학살자유족회 활동이라든지, 교원노조결성투쟁, 2대악법반대투쟁 등이 모두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투쟁의 중심에 있었던 20,30대 젊은 활동가들이 바로 인혁당 사형수들이었다. 이러한 투쟁경험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3선 개헌을 해서 대통령이 되고 유신쿠데타를 일으켜 종신집권을 하는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6.3항쟁때도 민청학련사건 때도 이들은 제2의 사월혁명을 꿈꿨으며, 그리고 나면 새사회 건설에 나서겠다는 꿈을 이어가고 있었던 분들이셨다. 이분들의 꿈은 자주독립국가 건설이었다. 해방이 되도 외세를 몰아내지 못하고, 그 외세에 의해 분단과 전쟁이 벌어진 상황을 너무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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