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 고교학점제는 과연 악의 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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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학점제는 한마디로 졸업에 필요한 학점을 이수해야 하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그전에는 출석일수를 중심으로 졸업 기준을 정하였다. 진로교육, 학교 교육과정 다양화, 학생 선택권 보장, 책임교육 실현 차원에서는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 고교학점제 정책이 시작되었으며 윤석열 정부로 이어졌다.
하지만 모든 정책이 그러하듯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크다. 최근 들어 고교학점제를 전면 폐지하라는 요구가 일부 교원단체를 중심으로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폐지 요구의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한데, 그 핵심 논리는 다음과 같다.
① 시기상조론 - 고교학점제의 철학과 취지에는 기본적으로 동의하지만, 고교학점제에 관한 준비가 현재 매우 미흡하고, 졸업에 필요한 학점을 이수하지 못한 학생을 유급시켜야 하는데, 온정주의와 형식주의가 강한 우리나라의 학교 현실에서 실제 유급시킬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외국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우리나라에서는 어려움이 존재한다.
② 신자유주의론 - 학생의 선택에 의존하는 교육과정 운영은 시장 기제를 차용한 방식이며, 보편교육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다양한 과목을 열고 학생의 선택권에 의존하는 방식은 교원의 노동 조건만 악화시킬 수 있다. 학생들의 다양한 교과목 수요를 고려하다 보면 자칫 교원자격증이 없는 이들에게도 교원의 문호를 열 수 있는 우려도 있다.
③ 기-승-전-대입론 - 고교 교육은 대입의 영향으로부터 결국 자유로울 수 없고, 내신 상대평가 체제와 수능의 비중이 여전히 높은 상황에서 고교학점제는 홀로 생존하기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다. 자신의 진로에 맞는 과목 선택을 하면 좋겠지만, 학생들은 좋은 내신 등급을 얻기에 유리한 과목이나, 수능에 도움이 되는 과목을 중심으로 선택할 가능성이 크며, 고교학점제는 탁상행정의 전형으로 대입 제도를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고교학점제는 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난 것일 수 있다.
④ 교육부·교육청 무능론 및 지원 미비론 - 고교학점제는 문재인 정부에서 시작한 정책이기 때문에 윤석열 정부에서 고교학점제는 일종의 서자(庶子)이며, 방계(傍系) 정도에 불과한 변방의 정책으로 취급을 받았다. 이주호 장관의 관심사는 인공지능(AI) 디지털교과서에 있다. 정권교체 후에 교육부는 고교학점제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역량 부족인지 의지 부족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장의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는 제도와 정책을 거의 준비하지 않았다. 교육청 역시 교육부의 입만 바라볼 뿐 무능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교육청 간 실력 차이도 나타나고 있다. 교육행정정보시스템(나이스)도 고교학점제와 연동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외부 사설 업체가 만든 별도 프로그램에 의존하여 학교 시간표를 짜는 상황에 이른 현실을 말한다.
⑤ 노동 환경 악화론 - 고교학점제의 도입으로 인해 가뜩이나 힘든 교사들의 업무가 가중되기 시작했다. 교육부와 교육청은 지침을 쉽게 내리지만, 결국 교사들이 몸으로 때우고 있다. 여러 과목을 개설해도, 최소성취수준에 도달하지 않은 학생을 위해 상담과 별도의 보충수업을 운영해도 보상은 없다. 무엇이든지 학교에서 알아서 논의해서 결정해야 하며, 교육부와 교육청에서 마련한 지침대로 일을 하려면 교사들의 체력을 갈아 넣어야 하는 현실을 반영한다.
이러한 어려운 현실을 놓고서 차기 정부에서도 고교학점제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교원단체의 주장대로 고교학점제 전면 폐기는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시작도 못 한 고교학점제가 모든 문제의 원인?
교육부가 고시한 2022 개정교육과정 초·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을 보면 '학점'이라는 용어가 88회 언급된다. '선택'이라는 용어도 66회 언급된다. 적어도 고등학교 수준에서는 2022 개정 교육과정 자체가 고교학점제의 철학과 방향, 가치, 체제를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다. 고교학점제 전면 폐지는 2022 개정교육과정의 전면 폐지와 동일한 주장으로 봐야 한다.
또한, 공정성을 이유로 내신과 수능의 상대평가 기조를 유지한 상태여서 불만족스러운 면이 상당히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2028 대입제도는 고교학점제를 고려하여 재설계된 측면이 있다. 윤석열 정부에서도 인수위 시절에 고교학점제 폐지를 검토하였지만, 유지로 결론을 내렸다. 전면 폐지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며, 오히려 폐지가 더욱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고교학점제 정책은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개념은 아니다. 적어도 우리나라 교육과정 개정의 역사 가운데 조금씩 스며들어 왔고 진화되었다. 그러나 학교 현장이 최근 들어 힘들어지다 보니, 고교학점제를 사실상 '악마화'하려는 시도도 있다. 고교학점제 때문에 사교육비가 증폭하고 있으며, 학생들의 자퇴가 늘어났고, 학교 간 격차가 더욱 커졌다는 식의 '공포 마케팅'이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혹자는 고교학점제가 이미 실패한 정책이라고 말한다.
고교학점제는 정확히 말하면 아직 시작했다고 보기 어렵다. 고1은 공통과목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표준화되어 있다. 상당수 학생들이 여전히 수능을 보고, 교원의 기본 수급을 고려하여 일반선택 과목(화법과 언어, 미적분1, 영어1, 영어2, 세계사, 물리학, 사회와 문화, 체육1, 체육2, 음악, 미술, 연극 등)을 중심으로 편제·운영한다. 학교의 지정 과목 비중이 상당히 높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여기에 진로선택과 융합선택은 2학년과 3학년 때 본격 적용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고교학점제는 202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런 상황에서 고교학점제 도입 반년 만에 사교육비와 자퇴생이 늘어났고, 고교 간 격차가 심화되었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는 고교학점제가 직접적인 원인이라기보다는 내신 상대평가 기조라든지 정시의 비중 확대와 같은 대입 제도라든지, 지역의 여건에 따른 학교의 교육력 차이 발생과 같은 우리 교육이 안고 있는 근본 모순과 한계가 누적된 결과로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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