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 일본 패전 후 80년 동안 '헌법정신' 구현한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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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는 스스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헌법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80년을 걸어왔습니다."
아치무라(阿智村)는 나가노현 시모나이군과 기후현 경계에 위치한 인구 약 5700명 규모의 산촌 이다(한 해 예산은 약 77억엔 규모, 공무원은 82명이 근무하고 있으며 의회 의원은 모두 12명이다. 56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돼 있으며 8개의 자치회가 활동 중). 이 작은 마을이 일본 전역의 주민자치 사례 중에서도 주목받는 이유는 자치를 '주민 스스로 주체 가 되는 구조'로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중심엔 이를 꾸준히 말하고 이끌어온 '사람'이 있다.
그중에서도 아치무라 자치 활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은 오카니와 카즈오 전 촌장이다. 4선 촌장을 역임한 그는 정책 마련과 집행 전 과정에서 주민이 직접 참여하는 구조를 마을에 뿌리내리는 데 힘 써왔다. 오카니와씨는 "자치는 주민이 지역과 생활의 주체가 되는 것"이라며 아치무라의 자치 철학과 구체적인 실천 사례를 소개했다.
그가 이러한 철학에 눈을 뜨고 실천하게 된 배경에는 50여 년간의 공직생활과 공무원노동조합 활동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노조 활동을 통해 자치체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고 학습하며 연구했던 경험은 주민과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촌장으로서의 토대로 이어졌다. 그는 "공동학습을 통해 마을의 방향을 함께 설정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내가 더 많이 배웠다"고 말한다.
에도시대부터 이어진 '공동체 자치'의 뿌리

오카니와 전 촌장은 주민자치의 기원을 에도시대의 '무라(村, 촌)'에서 찾는다. 당시 무라는 물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루고, 물을 관리하는 신사를 통해 공동의 규범을 세웠다. 이러한 무라는 단순한 생활 단위를 넘어 '번(藩)'과 '막부'에 세금을 납부하며 공공의 책임을 지는 자치적 공동체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천황 중심의 중 앙집권 국가를 수립했고 기존의 '무라'는 '시·정·촌'이라는 지방자치단체로, '번'은 '현'으로 재편됐다. 오카니와 전 촌장은 "에도시대의 무라를 바탕으로 유럽식 지방행정구조를 흉내낸 것"이라며 이 과정이 국 가 주도의 구조 개편이었음을 지적한다. 무엇보다 그는 "공동체가 국가보다 먼저 '존재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시·정·촌은 국가가 만든 단위가 아닙니다. 원래 존재하던 공동체를 행정이 나중에 규정한 것일뿐입니다. 자치체는 본래 공동체 기반의 자치적 삶에서 출발한 것이죠."
하지만 '강한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메이지유신은 이 자치 구조를 국가 체제의 하위 단위로 흡수·편입시켰다. 그 결과 시·정·촌은 주민이 스스로 지역을 운영하던 자연스러운 공동체 질서와는 달리, 중앙집권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 전용됐다. 애초부터 자치의 본래 의미가 왜곡된 채 국 가가 출발한 셈이다. 천왕제 중심의 국가를 위해 '희생과 봉사의 존재'로 규정된 시·정·촌은 결국 국가 권력의 도구로 악용됐다. 이러한 흐름은 패전까지 이어졌다.
오카니와 전 촌장은 "패전 때까지 시·정·촌의 희생과 봉사를 요구하는 교육은 시·정·촌 행정이 직접 담당했다"며 당시 시·정·촌이 중앙정부의 전쟁 수행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는 기반이었음을 지적했다. 그는 이 시기가 일본의 식민지 착취가 극심했던 시기였다고도 덧붙였다. "이 지역에 있는 댐 도 조선에서 강제로 동원된 노동자들이 건설한 것"이라는 게 오카니와 전 촌장의 말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고 성찰하기 위해 아치무라는 1985년 '비핵평화자치 단체선언'에 이어 2013년 '만주몽고개척평화기념관'을 개관한다. 식민지 침략과 동아시아 전쟁에 대한 반성과 평화를 다짐하는 공간으로, 지역 차원에서 식민주의와 전쟁 책임을 직시하고자 하는 시·정·촌의 태도를 보여주는 사례다.
헌법 정신으로 만든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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