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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최고관리자 /  DATE: 25-04-12 10:39 /  HIT: 7회

오마이뉴스 | 삿포로에서 무장봉기 준비한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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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중국이 아닌 일본 땅에서 무장봉기를 준비한 한국인들이 있었다. 이들이 추진한 일은 식민지 한국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일본제국주의가 가장 막강했던 곳은 다름 아닌 일본 땅이다. 일제의 민중 동원에 가장 직접적으로 노출된 곳도 그곳이다. 그래서 일본인도 봉기하기 힘들었던 그곳에서 객지인인 한국인들이 무기를 드는 것은 더욱더 어려웠다. 그런데도 그것을 시도한 재일한국인들이 많았다. 1944년 9월 28일 홋카이도섬 삿포로에서 검거된 문종달과 김갑순·김정협·장복성은 그중 일부다.

문종달 등이 봉기를 준비한 홋카이도는 한국보다 먼저 일본에 강점됐다. 아이누족의 땅인 이곳은 유구왕국(오키나와)보다 10년 빠른 1869년에 병합됐다.

작년 9월에 <동방학지> 제208집에 수록된 히라노 가쓰야 UCLA 교수의 논문 '주권과 무주지 – 홋카이도 정착식민주의'는 일본의 식민지배 논리가 최초로 적용된 무대라면서 홋카이도의 역사를 설명한다. 논문은 '자국은 주권국가이고 유럽 이외의 약소민족 땅은 주인 없는 무주지'로 간주하는 서양제국주의의 논리가 일본에 의해 응용된 것을 언급하면서 "이 식민지주의가 처음 실행된 곳은 아이누 모시리(홋카이도)였다"고 말한다.

홋카이도는 식민지로 전락한 아이누족의 한이 서린 곳이다. 그런 섬에 문종달이 나타난 때는 1943년 7월이다. 국가보훈부의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제3권에 수록된 일본 내무성 정보국 특별고등경찰자료는 이때 문종달이 홋카이도철도공업주식회사의 토목 노동자로 입사했다고 말한다.

특별고등경찰자료에 따르면, 1944년에 문종달은 26세이고 본적은 충남 대덕군 기성면 도안리다. 홋카이도철도공업에 들어간 뒤 반자(飯場)라는 합숙소에 기거한 그는 자신이 항일투쟁으로 기울게 된 것은 민족차별 때문이라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도항 전의 예상과는 달리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차별적 모욕과 노무관리, 그중에서도 식량 기타 모든 물자의 부족 등을 체험함에 이르러 민족의식이 점차 치열"해졌다고 진술했다.

그는 식량 문제에서도 차별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이런 차별은 대부분의 재일 한국인이 흔히 겪는 일이었다. 먹는 것 갖고 차별하는 일은 음식값을 받는 식당에서도 일어났다.

일본에서 경험한 차별

작년 8월 7일 개봉한 이원식 감독의 <조선인 여공의 노래>는 오사카의 한국인 직공들이 식당 주인들의 노골적인 차별 때문에 휴일에 외식을 하기도 힘들었다고 말한다. 한국인 손님을 손님으로 대하지 않고 '조센징'으로 대하는 식당 주인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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