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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최고관리자 /  DATE: 24-04-07 19:30 /  HIT: 11회

오마이뉴스 | 우리 부부는 밤마다 침대 위에서 이걸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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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벌레다. 글자를 깨우치고 여섯 살 무렵, 버스를 타고 외할머니집에 갈 때, 버스 창문에 코를 박고 차창 밖에 흘러가는 간판에 적힌 글자를 읽고 또 읽을 수 있어 즐거웠다.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지는 글자들은 놀이공원의 놀이기구보다 더한 짜릿함을 선사했다.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 아랫집에 살던 봉석이네 거실에 앉아 벽장 가득 들어찬 전집들을 읽었던 오후들, 여름방학마다 학교 도서관에서 열린 독서 교실, 고등학생 시절 입시 공부 대신 대학생 삼촌들이 추천한 책을 탐닉했던 여름들, 취업에 실패하고 좌절할 때조차 손에서 놓지 않았던 소설들, 서울에서 고독하게 자취하던 시절 가장 가까운 친구도 책이었다. 고리타분한 주례사의 한 대목처럼 '즐거울 때나 기쁠 때나 외로울 때나 슬플 때나' 책과 함께 했다. 

애서가(愛書家)와 글을 읽지 않는 이의 만남

이토록 책을 사랑하는 나는 평생 읽은 책을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학교 다닐 때 책 좀 읽고 글 좀 쓴다며 허세부리던 남자들을 자주 봐서였을까, 굳이 나처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반드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책과 거리가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결혼 후 십 년 동안 남편에게 책을 권해볼 생각을 해본 적은 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은 자신이 하고 싶어야 하는 것이지 누가 제안한다고 재미를 붙일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런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내가 계속 책을 읽으니, 남편도 언젠가 책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남편이 먼저 나에게 책을 추천해달라고 묻기를 기다렸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기다리는 사이 십 년이 흘렀다. 남편은 여전히 자신을 위해 책을 읽지 않았지만, 아이들 책은 누구보다 재미있고 진지하게 아이들에게 읽어주었다. 성대모사도 하고, 없는 이야기도 지어내고, 아이들에게 소소한 질문도 던지는 책 이야기꾼이 되었다. 이 정도도 충분하다 여겼기에 책을 읽으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다만 가끔 읽고 있는 책의 재미있는 대목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하거나, 아이들을 재우려 온 식구가 다 같이 누워있을 때 좋아하는 시를 읊어주거나, 남편이 좋아하는 주제와 관련된 글을 따로 보여주는 정도로만 책과 관련된 메시지를 흩뿌리고 다녔다.

해외살이가 시작되고 천 권이던 책을 백 권으로 줄이고, 그 백 권이 알을 낳듯 오백 권으로 늘어날 때마다 남편은 이삿짐을 싸고 푸는 노동에 힘들어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책이란 것을 알았기에 마당에서 책을 태워 없애거나 나 몰래 갖다 버리는 수준의 만행(?)은 저지르지 않았다. 그러나 빼곡히 책이 들어앉은 책장을 보며, 내가 쉼 없이 사다 나르는 책더미를 보며 고구마를 먹다 목구멍이 막힌 사람처럼 갑갑해했다. 

아이들을 모두 재워놓고 잘 준비하던 어느 밤이었다. 남편이 꺼낸 한마디에 자려고 눕다 말고 벌떡 앉았다. 

"나도 책을 좀 읽어볼까?"
"갑자기, 아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일할 때, 가끔 머리가 잘 안 돌아간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거든. 어릴 땐 눈치도 빠르고, 하나를 배우면 정말 열을 알게 되는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가끔 바보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책을 읽지 않아서 이렇게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 그럼 이참에 책을 읽어보자. 꼭 일을 잘하게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뭔가 새로운 것을 느낄 수 있는 자극제는 될 것 같아. 너무 욕심내지 말고 자기 전에 20분씩 읽어보자."
 
우연하게 시작한 부부의 밤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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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리의 밤 독서가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잘 자란 인사를 하고 우리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각자 읽을 책을 꺼내 든다.

노래도 틀지 않고, 밖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와 빗소리가 우리의 숨소리와 뒤섞이고, 책장을 넘기는 소리는 불규칙적이지만 기분 좋은 추임새가 된다. 20분을 읽자고 시작했는데 날이 갈수록 책을 읽는 시간은 길어져서, 어떤 날은 한 시간이 훌쩍 흘러 둘이 마주 보고 깜짝 놀란 날도 있었다. 

나는 남편에게 맞춤형 큐레이터가 되었다. 최재천 교수의 <최재천의 공부>를 시작으로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김소영 작가의 <어린이라는 세계>, 박준 작가의 <계절 산문>,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 백수린 작가의 <눈부신 안부>, 나이키 창업자 나이트필의 <슈독>까지 3개월 동안 남편은 여섯 권의 책을 읽었다. 한 달에 한 권을 읽겠다는 목표가 있었는데, 목표 달성률이 200퍼센트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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