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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최고관리자 /  DATE: 21-10-10 11:16 /  HIT: 16회

오마이뉴스 | "이 수첩에 있어요, 돈과 바꾼 나의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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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8월 31일. 기름때가 스미고 스민 작업 노트 한편엔 아들이 태어난 날짜가 적혀 있다. 그날도 기어이 일했다. 돈을 벌어야 가족이 먹고살지 않겠나. 아내도 당연하게, 오히려 일할 수 있음을 감사히 여겼다.

"이 낡은 수첩엔, 내 삶이 깃들어 있어요. 돈과 바꾼 소중한 나의 시간이..."
 
이름은 강철(63). 철공 일을 하는 아버지가 쇳덩이처럼 불속에서 더 강하게 살라 지어주셨다. 이름처럼 운명처럼 아버지의 삶을 대물림받았다.'
'꽃가루 설거지 비 내려 더 부산한 화요일 / 프레스 발판을 밟을 때마다 / 쇳밥 한 숟가락이 쏙쏙 쌓이고...' - 김종필의 시 '쇳밥' 중에서

'윙윙~ 끼이익~' 기계 소리에 귀를 찢기고 '쇳밥'을 삼키며 평생을 살았다. 태어난 강원도 속초 바닷가에서 배의 낡은 엔진 고치며, 노동자의 삶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바다가 말라가고 일이 줄면서, 1983년 스물여섯에 인천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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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값이 싼 송림동과 도화동 사이에 전세를 구했다. 연안부두에서 안강망 어선 고치는 일을 하다, 2년 후 주안공단으로 갔다. 자동차 부품과 산업 플랜트를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다. 건강한 육체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아 피땀으로 단련한 기술이 있었다. 머지않아 작업반장이 됐다. 그의 손으로 인천기계공고를 졸업하고 막 입사한 청년들을 기술자로 길러냈다.

1970~1980년대 주안공단은 부평 수출 산업 단지와 함께 대한민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다. 치열한 노동운동의 현장이기도 했다. '한 세대의 희생'을 당연히 여기던 시절이라지만, 감내해야 하는 시간은 혹독했다. 매일 밤 10시까지 일해도 한 달에 고작 이틀 쉴 수 있었다. 고된 노동의 반만큼의 대가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다 1987년 여름, 그날이 왔다.
 
공장 곳곳에 '노동 형제여, 하나 되자'는 격문이 뿌려지고 농성이 일었다. 회사와 동료들 사이, 그가 있었다. 자신만 바라보는 아내에 자식도 셋이나 됐다. 번뇌에 휩싸였지만, 회사가 아닌 후배들 편에 섰다.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들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끝까지 같이 가자 결심했지요."

한 달간의 싸움이 끝나고 처우는 좀 나아졌지만, 노조는 끝내 결성하지 못했다. 머지않아 회사는 반월공단으로 이전하고, 그는 사직서를 냈다.
 
"노동자의 삶은 고단했습니다. 그래도 돌아보면 가슴 뜨거워요. 작업장에 틀어박혀 인생을 내어주고 만든 것들이, 누군가에게 쓰임 받았다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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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 대신 붓을 들다

그 후로도 그는 줄곧 기계를 만지며 부단히도 열심히 살았다. 그래도 1990년대는 노동자의 대우가 좋아져 일하는 시간이 줄고 급여가 늘었다. 기술만 있으면 밥은 먹고살 만했다. 1997년 IMF 외환위기가 오기 전까진. "듣도 보도 못한 비정규직이 생겨났어요. 우리는 사장이 그만둘까 봐 겁내던 숙달된 기능공인데 말이죠."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하루아침에 잘려 나갔다. 빈자리는 다시 채워지지 않았다. 큰 회사부터 줄줄이 무너져 내렸다. 그가 다니던 공장도 결국 부도가 났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당직으로 전국을 떠도는 신세가 됐다. 아내는 아내대로 현대시장에 숙녀복 매장을 열고 되지도 않는 장사에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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